비너스의 불량

철구's Blog is powered by Textcube

#포로노 배우인 막내딸의 영화 촬영을 위해 다시 모인 가족. 그러나 그 영화는 다름아닌 그 가족의 실제 삶을 영화로 찍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다시 과거의 상처를 떠올리며 반목하는 가족들. 아버지의 새집을 담보삼아 은행 융자를 받자는 어머니와 죽어도 안된다는 아버지의 대립. 처음으로 가족여행을 떠나지만 그 가족여행 역시 불행하기만 하고 직장에서 해고당한 아버지는 보험금을 가족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실종된다.  

"영화의 진정한 기능은 허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 체사레 자바티니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주창자였던 자바티니의 이 말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도둑'이 허구가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그 역시 픽션이며 허구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들의 영화가 허구적이지 않다고, 허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현실을 망각시켜 현실을 대중과 유리시키며, 그들을 마비시키고, 특정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비일상적이고 스펙터클한 미국 영화가 그들의 반대편에 서서 오로지 허구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스스로 공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오리얼리즘의 영화들은 자신의 이름만큼 현실적이다. 환상 속의 꿈공장에서 현실로 내려오려 한다.

그러나 사실주의 영화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구축하기 위해 선호하는 형식들에도 나름의 한계가 존재한다. 가장 객관적인 형식이라는 정면 롱쇼트나, 현실의 시간을 살려내기 위해 최대한 편집하지 않는 롱테이크 등은 비록 그것이 대상과의 동화를 거부한다고는 하지만 이 시대에는 이미 형식화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시절'을 통해 계속 드러나는 롱쇼트와 롱테이크는 사실적이기보다는 구성된 풍경화와 같은 효과만 거둘 뿐 이미 현실이 아니다. '아름다운 시절'과 같이 계산되고 조작된 화면 구성을 보이는 영화를 차치하고 보더라도 사실주의 계열의 객관적인 형식은 그간 그 계열들의 영화들이 거둬들인 미학적 성취들 속에서 존재하며 우리 또한 그런 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리고 그들이 조명한 현실은 그 형식에서처럼 우리에게는 객관적이고 멀리 있는 현실로 자리한다. 그들이 조명한 대상 현실과 관객은 서로 다른 공간적 현실에 위치할 뿐이라는 것이다. 문제가 이쯤되면 뭔가 심각한 착오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곧 허구적, 비일상적, 극적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민 미국 영화들이 그들의 고전적 쇼트, 연속 편집, 마스터 촬영술 등을 통해 관객을 그 허구와 동화시킴으로써 실존하는 사실적 현실을 망각시키는 것에 대항해 사실적, 일상적, 실존적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민 사실주의 계열의 영화들이 그들의 객관적 형식인 롱쇼트와 롱테이크를 통해 허구와 동화되어 버린 관객을 허구의 환상으로부터 떼어놓지만 그 와중에는 그들이 조명한 현실과 관객이 자리한 현실간의 필연적인 거리를 발생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허구에 동화된 관객'과 '현실과 유리된 관객'....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 라고는 그 누구도 섣불리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가치판단을 떠나서 양자 모두 진정한 현실과 상봉하고 있지는 못하다. 미국 영화는 환상만을 쫓고 사실주의 계열의 영화들은 현실을 관객에게 내려줬지만 멀찍이서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식적 접근의 측면에서 한가지 실험이 더 남아있다. '현실(사실적, 일상적, 실존적)에 동화된 관객'..... '가족 시네마'는 바로 이것을 획득하려 한다.

'가족 시네마'가 어떻게 '현실과 동화된 관객'이라는 실험적인 효과를 성취하는지 살피기 위해서는 이 영화의 구조를 먼저 기술해야 한다. '가족 시네마'는 그 제목처럼 한 가족이 그들의 삶을 영화로 찍는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때문에 그 안에서 우리는 두 개의 카메라 렌즈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실제 존재하는 현실과 '가족 시네마'라는 텍스트를 분리시키는 카메라 렌즈(실제 카메라)이며 또 다른 하나는 텍스트 안에서 그 가족들을 영화화하는 카메라 렌즈(텍스트 카메라)이다. 또한 이 두 개의 카메라 렌즈에 의해서 현실은 다시 세 가지로 나뉘는데 그것은 실제 관객이 자리하고 있는 현실(관객 현실)과 실제 카메라가 들여다보고 있는 현실(텍스트 현실1, 영화 속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스텝이 위치한 현실)과 텍스트 카메라가 들여다보고 있는 현실(텍스트 현실2, 재일 교포 가족이 위치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 각각의 공간에 위치한 이들은 관객, 스텝, 가족으로 다시 나뉘게 된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가족 시네마'에서 보이는 공간 구조>                        

이 구조 안에서 공간은 모두 각개 인물이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두 개의 카메라는 각 현실을 분리시키는 경계로써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그 가족들의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은 처음에는 시나리오에 따라 구성된 픽션, 즉 허구를 만들려 한다. 그러므로 그에 따라 제작된 영화는 텍스트 카메라 안에서 하나의 허구적 현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감독은 점점 영화를 논픽션화시켜 다큐와 현실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줄타기하기 시작하며 그에 따라 가족 현실은 텍스트 현실 안에서 당초 계획대로 허구적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하나의 현실로 가꿔진다.  

이는 그 가족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끊임없이 텍스트 카메라를 넘나들면서 스텝 현실과 가족 현실의 경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나리오에 따라 대사를 하다가도 순간 순간의 감정에 따라 즉흥적인 연기를 남발하며 카메라를 쳐다보거나 그들의 공간과 다른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감독을 자꾸 불러들여 스텝 현실과 가족 현실의 상통을 도모한다. 처음 제작의도가 그것이 아니었던 감독은 점점 그들에게 동화된다. 그리고 끝내 가족 여행 장면에서는 그가 본래 존재해야 하는 스텝 현실에 위치하지 않고 가족 현실에 끼어들어 영화를 찍기 시작하는 것이다. 곧 이러한 과정을 통해 텍스트 카메라에 의해 분리된 두 가지 현실 공간(스텝 현실과 가족 현실)은 붕괴되고 커다랗게 텍스트 현실이라는 공간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텍스트 카메라라는 장치는 왜 설정된 것일까? 그에 의해 두 개로 분리된 현실이 결국 하나로 아우러진다면 텍스트 카메라라는 장치는 필요치 않은 것처럼만 보인다. 그러나 사실 텍스트 카메라가 기여하는 가장 두드러진 효과는 극장에 존재하는 관객 현실을 스텝 현실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 텍스트 카메라에 의해 관객은 멀찍이서 현실을 바라보는 제 삼자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곧 영화를 제작하는 바로 그 현장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실제 카메라와 텍스트 카메라의 자리바꿈, 시선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처음 그 가족들을 하나 하나 실제 카메라를 통해 들여다 본다. 그러나 그 안에 텍스트 카메라가 들어오면서부터 우리의 시선은 실제 카메라의 위치일 때도 있고 텍스트 카메라의 위치일 때도 있게 된다.  

그로써 우리는 점점 혼란해 지거나 때로는 그러한 사실을 상관하지 않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더 이상 극장에 있는 관객만이 아니라 텍스트 카메라를 통해 가족들을 들여다보는 스텝과 같은 현실에 있는 누군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 전반을 통해 텍스트 안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스텝이거나 그 구경꾼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우리는 끝내 관객의 현실을 포기해 버리고 마는데 왜냐하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화면이 바로 텍스트 카메라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곧, 실제 카메라의 시선으로 시작한 영화가 끝에 가서는 텍스트 카메라로 교체되어 버린 것이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교포 가족의 어머니는 텍스트 카메라를 들여다 보며 '이런 영화는 다시는 찍지 마'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바로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이며 그것은 우리가 극장이라는 제 삼자의 위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놀랍지 않은가! 항상 허구의 환상이나 박제된 현실만을 이야기하던 영화가 어느새 텍스트 안의 현실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우리가 영화 속의 인물과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처럼 '가족 시네마'는 텍스트 현실과 관객 현실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다. 곧 앞에서 언급한 '현실과 동화된 관객'을 이룩해 낸 것이다. 이러한 성과의 뒤에는 지배적, 관습적 촬영이나 편집술의 거부가 주효했다. 왜냐하면 전언했던 두 가지의 텍스트 현실과 관객 현실을 모두 소통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현실도 영화적으로 보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것은 제작되어지는 그 현실의 느낌마저 살려야 하기 때문에 캠코더 홈비디오와 같아야 하며 그런 이유로 180도 선, 마스터 촬영술, 픽스드 카메라, 연속 편집이나 고전적 컷팅 등은 '가족 시네마'에서 최소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의 제목에서 '가족 시네마'를 '감히 말하는 90년대 한국 영화 최고의 걸작'이라 칭했다. 우리가 지금 걸작이라고 길이 높이는 영화는 대개 영화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볼 때 앞으로 도약적인 영화 기술의 발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마 '가족 시네마'와 같은 류의 형식 실험이 커다란 사조를 새롭게 엮으며 흐를 것이고 그렇다면 '가족 시네마'는 그 선봉에 선 영화가 되어 그 의미는 가히 지대해 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러한 흐름은 시작되었다. 도그마 95가 지닌 순수의 서약의 정신은 '가족 시네마'가 텍스트 카메라라는 장치를 설정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도그마 95가 약진하고 있다면 '가족 시네마'도 충분히 약진할 수 있으며 다시 한 번 그 가치를 재구해야만 한다. 우리네 잘난 영평가들과 영화계 관련 종사자들은 지금 어디에서 삼사오오 대가리박고 짤짜리하고 있는지....

마지막.... 항상 많은 분량의 원고를 낸다고 구박하는 사람들이 견제하는 통에 '가족 시네마'의 형식적 접근밖에 살피지 못했다.(벌써 A4 3장 반이다) 개인적으로 '가족 시네마'는 카메라를 현실 분석의 도구로 간주하여 현실을 잘 드러낸 내러티브의 장점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여기까지 이야기해보도록 노력할 것이다.



철구 백
2003/01/12 06:23 2003/01/12 06:23

TRACKBACK :: http://chulgoo.com/trackback/349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1  ... 648 649 650 651 652 653 654 655 656  ... 658 
BLOG main image
비너스의 불량
불량으로 대동단결
by 철구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 (658)
잡글 (213)
궁상 (142)
영화 (190)
시·소설 (53)
패러디기자협회보 (7)
샤따질 (50)
textcubeDesignMyselfget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