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의 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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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영구(박중훈)와 동석(장동건)을 비롯한 강력반 형사들은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점점 용의자는 좁아지고 장성민(안성기)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형사들은 그의 애인(최지우)를 통해 장성민을 검거하려 하지만 신출귀몰한 장성민은 형사들의 포위망을 번번이 벗어난다. 그러는 와중 동석은 장성민에게 당해 식물인간이 되고 이에 악이 받힌 영구는 집요한 추적 끝에 성민과 혈투를 벌이지만 패하고 만다. 그러나 그새 이미 성민은 경찰들에게 포위되어 버리고 마침내 검거된다.



#2. 나는 이명세를 오타쿠한다.



나는 이명세를 좋아한다. 사랑한다. 광적으로 오타쿠한다. 절대로 남자와는 친하지 않는 주의지만 이명세만은 그런 나의 취향에서 벗어나 있고 나는 그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의 이런 애모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아마 '남자는 괴로워'에서 안성기가 부르는 아빠의 청춘을 필두로 싹트기 시작하여 '지독한 사랑'에서 이미 나의 이명세 오타쿠는 깊어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개봉하기 전부터 나는 열렬한 이명세 스토커였던 것이다. -김희선과 바꾸자 그래도 안 바꾼다. 한고은은 생각 좀 해 봐야겠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이명세를 이야기해야 된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후 딱 10년만에 다시 스포트라이트가 화려한 무대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나의 주교님을 왈가왈부해야 된다. 과연 내가 그럴 수 있는 역량과 자격이 있을까 하고 고민하니 괜히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쓰겠다고 큰 소리쳤다는 물밀 듯한 후회가 닥쳐온다. 나는 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골랐을까? 그 하고 많은 영화 중에 하필이면 이 영화를 비디오 출시되자 마자 빌려와 카피 떠 놓고 죽어라 돌려 봐가며 그 박터지는 작업을 하겠다고 왜 스스로 애써 자청 했을까? 오타쿠 패밀리를 늘려보려는 철없는 생각이였을까? 아님, 그간 이명세에게 무심했던 사람들에게 대한 원망이였을까? 아,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여하튼 '인사볼'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3. 비릿한 밑바닥의 현실이 꿈꾸는 방법



이명세의 영화를 이야기하면 으레 그의 세트 촬영과 미장센을 거론한다. 그렇다. 그는 확실히 세트 촬영의 대가이며 계산된 미장센의 승부사다. 그리고 '인사볼'은 그의 그런 세트 미학적인 미장센이 현장으로 확장되었다는 아름다움을 듬뿍 안고 있는 영화다. 40계단 살인사건 현장의 노란 단풍잎과 계단의 구도와 색감의 아름다움, 혹은 영구와 성민이 선술집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에서 영구와 동석의 어깨 너머로 잡힌 성민의 모습, 혹은 성민을 프레임 왼쪽에 살짝 걸쳐 놓은 다음 총과 수갑을 던지며 점점 다가오는 영구의 구도 등에서 오는 긴장감, 가물치와 영구의 추격씬에서의 외하면을 이용하여 웃음을 유발하는 화면 구성, 옥상 격투씬, 기차안에서 동석과 성민이 대립하는 씬, 달동네 골목에서의 추격씬 등 그의 미장센이 거두는 아름다움과 서사 구축의 효과는 그의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가득하다. 끝. 그 만인가? 이명세를 이야기하면서 이정도만 이야기하면 할 말 다 한 것인가? 미장센을 잘 사용하는 감독은 이명세 말고도 아주 많다. 배창호 역시 비록 그가 테이크의 미학을 잘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화면구성에 의지하는 바가 크다. 또한 서편제에서의 화면구성 -그 유명한 진도 아리랑의 고개길과 인물의 동선을 잊지는 않았으리라!-과 창에서의 프레임 안에서 프레임을 구축하는 화면구성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뿐인가? '아름다운 시절', '삼공일 삼공이', '달마가 동쪽..' 등 많은 영화들이 기본적으로 편집보다는 미장센을 선호하는 경향이 크다. 그리고 외국 영화 중에서는 그런 예가 더욱더 많다.  



그런데 이명세의 미장센은 이들 영화와는 맛이 다르다. 때문에 이명세를 짚어내기 위해서는 그의 스타일적인 특성인 미장센을 짚는 것보다 이처럼 다른 맛을 얻어내는 그만의 독특한 조미료를 찾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그가 그의 미장센 안에다 잔뜩 뿌려놓은 그 독특하고도 향긋한  조미료는 과연 무엇일까?



이 조미료를 찾기 위해 '인사볼' 안에서 몇몇 장면을 살펴보자. 영화의 도입부에 보여지는 40계단 살인 장면은 두고 두고 인상적이다.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나뒹구는 가을, 연인과 함께 걸었음직한 낭만적인 배경 저만치에서 귀여운 꼬마애가 계단을 내려온다. 그리고 삽입화면으로 프레임에 걸쳐진 은행나무 가지와 파란 가을 하늘 뒤로 다가오는 먹구름이 마치 풍경화처럼 끼어든다. 서서히 로맨틱한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귓볼을 간지럽히는 가운데 선혈이 낭자하는 잔인한 살인 사건이 아이러니컬하게 녹아난다. 또 성민의 애인 집에서 형사들과 성민이 맞닥뜨리는 장면. 성민이 그의 애인 집으로 도착한다는 메세지를 받은 경찰들은 불시에 찾아든 성민에 의해 집 안팎으로 숨기위해 소동을 벌인다. 이 소동은 고속촬영되고 그 배우들의 동작은 마치 슬랩스틱 코메디를 보는 것처럼 상당히 과장된다. 그 긴박한 순간, 그 순간은 형사들에게는 가장 당황되고 어려운 혹은 임무를 수행하느냐 못하느냐의 기로에 놓인 다급한 현실이겠지만 감독의 시선은 그 긴장감을 풀어 헤쳐내고 현실의 무게를 희화시킨다. 이러한 고속촬영으로 강조되는 연기의 과장은 영화 내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아마 채플린에 대한 동경이 아닐까 싶다.-실제로 이명세 감독은 채플린을 가장 좋아한단다... 또 새벽의 경찰서. 그 숨가쁜 하루를 보낸 형사들이 이제 사무실에서 조서를 꾸미고 자료를 찾으며 그 날을 마감한다. 이 때 들리는 동석의 나래이션. '새벽에 들리는 타이핑 소리는 형사에게 자장가와도 같다' 그리고 동석은 슬그머니 졸음에 빠진다. 옥상 결투씬 역시 그렇다. 자존심을 건 짱구와 영구의 한판 승부는 오히려 판토마임을 보여주듯 처리되어 그들의 피 튀기는 싸움은 더 이상 잔인하거나 살벌하지 않다.  



이제 이명세 만의 독특한 조미료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듯 하다. 그렇다. 이명세는 '인사볼' 안에서도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영화가 항상 지니는 그 특성 그대로 '인사볼'은 현실을, 그 무거운 현실의 짐, 현실의 냉혹함, 현실의 긴박함을 그의 조미료로 더 이상 냉혹하거나 싸늘하지 않게 만들어 꿈꾸고 있는 것이다. 40계단 살인 장면에서 비가 쏟아지는 한 가운데 너무도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송영창은 오히려 이명세의 화면 안에서는 아름답다. 긴장의 순간들은 배우의 과장된 연기로 전혀 긴장되지 않는다. 결투는 이미 유쾌하고, 하루의 피곤이 밀려오는 새벽이더라도 타이프 소리에 꿈을 꿀 수 있다. 성민 애인의 집, 수증기를 뿜으며 달그락 거리는 물주전자의 따스함처럼 이명세가 바라보는 현실은 그것만으로 벌써 그의 상상 안에서 따스하게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 그가 발딛고 있는 현실이 흥미롭다. '인사볼'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영화 안에서의 배경은 한번도 그럴싸한 빌딩, 거리, 술집 등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배경은 모두 선술집, 경찰서, 달동네, 탄광촌 뿐이다. 곧 이명세가 발딛고 있는 현실은 너무도 서민적인 아니, 서민적이라고 하기에도 못 미치는 밑바닥의 모습인 것이다.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졸음이 밀려들 듯한 옛 이발소, 'XX고교'가 등에 찍힌 영구 여동생이 입은 츄리닝, 달동네 선술집의 야릇한 카랜다, 자전거에 실어 배달하는 가스통.... 이렇듯 그가 발딛은 현실은 비릿하고 누추하다. 실상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가 꾸는 꿈이 이 비릿한 현실을 탈출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것 역시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히려 망상이나 환상에 가깝게 될 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이 현실을 달래고 이 현실 안에서 따스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 따름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면서도 그 배경만큼 암울해지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되려 그의 그 비릿한 현실이 우리를 훈훈하게 하고 따뜻하게 하며 위로한다. 추위와 졸음에 치떨리는 잠복근무 중에도 한 그릇 설렁탕이면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과로사로 죽은 '남자는 괴로워'의 안성기 과장은 죽어서 천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불륜으로 맺어진 사이이면서 죽어라 싸우고 죽어라 사랑하는 '지독한 사랑'의 최교수와 여기자가 그래도 여지껏 헤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처럼 이명세가 부둥켜 안은 세상과 현실은 현실에 의해 좌절하면서도 그렇다고 다시 현실에 갇히지는 않는 것이다. 이명세가 세상을 꿈꾸게 하는 방법... 이것이 바로 그가 지닌 그만의 조미료이다.



#4. 포장된 꿈 속에 내재한 리얼리즘



우리의 삶이 영화와 같을 수는 없다. 남파된 북한 여간첩과 사랑에 빠질 일은 죽었다 깨도 없을 듯 하고 보스의 정부를 사랑한 나머지 죽음을 당하는 일도 없어 보인다. 라면 먹다가 주유소를 두드려 까는 그런 간부은 용기가 우리의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변변한 일상인에 불과할 뿐이다. 때문에 우리의 삶을 기승전결에 따라 서술하기는 불가능하고 설령 가능하다치더라도 엄청나게 지루할 듯 하다. 우리는 살면서 간간히 기억에 남을 에피소드만 머금은 채 지내고 있을 따름이다.



이명세 영화들의 이야기 구조도 이와 비슷하며 때문에 그는 에피소드식 이야기 구조를 자주 사용한다. 우리의 삶이 에피소드의 연속이라면 그것이 가장 제대로 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중 조금 굵직한 에피소드 하나만을 가지고 영화를 구성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하나의 에피소드가 앞서 이야기한 영화들처럼 극적일 리는 만무하다. 오히려 그것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처럼 평범하고 흔한 이야기에 가까울 것이며, '세친구'나 '초록물고기' 홍상수의 영화에 나타나는 리얼리즘이 그 서사내용에서 주관적 리얼리즘에 치우치거나 강한 주제의식을 담아내는 그런 것이라면 반면 이 리얼리즘은 그저 우리의 일상을 담아낸다는 단 하나에만 집중한다. 이는 곧 영화의 존재론적 본질인 '허구적 사실성'마저 (허구는 그것이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닌 개연성 짙은 사건일 뿐이라는 점을, 사실성은 영화라는 매체가 현실을 가장 현실과 비슷하게 복제하여 반영하는 매체라는 점을 지칭한다) 회의하는 것이며 오히려 '다큐적 사실성' 혹은 '반허구적 사실성'에 영화를 자리잡게 하려는 것이다. -'허구적 사실성'은 사실 서사영화(극영화)에 천착된 특성일 따름이지만 오늘날 영화의 수용자는 영화를 떠올릴 때 모두 서사영화만을 생각하며,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는 그 때문에 더욱 더 좁아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허구적 사실성'을 해체하려는 이런 노력은 오늘날 좁아진 영화 매체의 범위를 확대하는 작업과도 일단 맥이 닿는 의미있는 무엇이다.



'인사볼'은 아무런 이야기를 전하지 않은 채 스타일만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러나 이런 '인사볼'을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이야기 구조 즉 그 열린 구조와 빗댄다면 나의 과욕인가? 물론 그러한 현실을 담아내는 형식과 틀은 너무나 다르지만 그 형식과 틀이 출발하는 현실은 혹은 이명세의 시선이 가 닿는 현실은 어쩌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상통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줄거리를 단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듯이 '인사볼'의 줄거리 역시 단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 일상 생활 중 하루를 요약하는 것과 같다. 사실 내가 오늘 한 일을 요약하면 학교에 가서 수업받고 술 한잔 하고 집에 왔다는 그 뿐이다. 물론 그 와중에 생긴 내 마음에 갈등이나 희망 혹은 고민과 불만 등도 덧붙인다면 얼마든지 길게 덧붙일 수 있다. 그러나 제삼자에게 그것은 좀처럼 객관적일 수는 없고 오로지 나의 주관과 입장만 강요된 줄거리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초록 물고기'나 '세친구' 등이 후자의 경우를 따르고 있다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나 '인사볼'은 전자의 경우만 따르고 있다. 때문에 영구와 성민의 심리적인 갈등이나 영화에 투영시킨 사회상, 깊이있는 사회적, 현실적 주제들은 이 에피소드에 필요치 않다. 더 이상 인물의 심리적 인과 관계에 극이 얽매일 필요가 없고 사회나 역사의 현실에도 종속될 이유가 없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오직 범인을 잡으려고 발버둥치는 형사들의 고생과 안 잡히려 발버둥치는 범인의 안간힘이 필요할 뿐이다. 영화의 전체를 통해 삽입되어 시간과 날짜의 경과를 보여주는 자막들은 그런 와중에서 우리가 인물에게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이며 중요한 것은, 살인 사건을 통해 연결된 형사와 범인의 삶 그 자체뿐이라는 사실을 자주 환기시켜 주는 매개체이다.그러므로 '인사볼'이 담아내고 있는 아무런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는 현실은 '아무리 현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우월한 이데올로기에 사무친 현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명제와 관련하여 볼 때 그로써 가장 순수하고 윤리적인 제재적 현실이 될 수 있으며, 때문에 '인사볼'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어떤 이란 꼬마의 생활의 부분을 담아낸 것처럼, 형사들이 수없이 부딪혀야 하는 사건 중에 하나를 담아냈을 뿐이다. 그리고 이명세는 자신의 독특한 조미료로 그 하나의 에피소드를 한껏 재미있게 양념을 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사볼'은 영구라는 형사의 일상의 한 단면이다. 영화는 끝에 가서 영구라는 형사의 또다른 단면을 준비한다. 노총각인 영구가 성민의 애인을 뒤쫓으며 경적을 울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냉담하다. 그렇다고 질기기로 소문난 영구가 포기할까? 잠시 고개를 떨구며 난감해 하던 영구는 차문을 열며 그 특유의 웃음을 얼굴에 띄운다. 그리고 프리즈 프레임!! 그 정지 화면에 담긴 영구의 표정은 힘써 쫓아다니리라, 그래서 결혼해 보리라 라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표정을 통해 영구의 다른 일상의 한 부분을 맘껏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궁금하다. 과연 우영구 형사는 결혼을 했을까? 항상 열려 있는 이야기 구조... 그것은 이처럼 우리의 상상을 자극한다.



그런 이유로 '인사볼'이 전하려는 사회적인 혹은 주제적인 메시지는 약하다는 사실은 인정되지만 그것이 '인사볼'의 취약점이 될 수는 없다. 만약 그것이 단점이라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전하는 의미 역시 찾기 어렵게 된다. 그저 인생과 삶을 제시하여 피드백하게 하는 영화... 단지 차이는 그 담겨진 형식과 틀일 뿐이다.



# 5. 단어가 많은 타고난 재담꾼



이명세의 영화는 그다지 전개가 빠르다거나 커트수가 많다거나 하지는 않다. 요즘은 어찌 된 게 커트수 많은 것이 자랑처럼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커트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지루한 영화는 지루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그런 영화는 눈까지 아프게 한다. 그에 비해 이명세 영화는 많은 커트수를 이용하지 않으면서도 지루하지 않다. 특히 '인사볼'의 경우는 지루할 새가 없다. 앞서 살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마찬가지로 '인사볼' 역시 관객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있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지 않고 오히려 충분히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만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인사볼'은 지루하지 않다...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



먼저 그의 미장센의 훌륭함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 팽팽한 구도와 화면 배치는 한 프레임 프레임마다 다양하게 시각 정보를 배분해 놓았다. 때문에 우리는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던 정보를 '인사볼' 안에서는 색다르게 받아들여야 하며 항상 새롭게 제시되는 정보에 신선해 한다. 화면구성이 훌륭한 영화의 장점이 바로 이 점이다. 매번 인물의 투샷을 같은 앵글로만 다가간다면 얼마나 식상할 것인가? 프레임 구성에 헛점이 많다면 또한 얼마나 허전할 것인가? '인사볼'은 때문에 정성스럽다. 한번도 구태의연한 앵글과 쇼트를 반복하려 하지 않고 매번 새롭기 위해 노력하며, 의미없이 피사체를 위치시키지 않고 매우 꼼꼼하고 치밀하게 공간배분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스텝 모두가 정성스러워야 한다. 정성스러움이 묻어나는 화면은 항상 그 노력이 엿보이기 때문에 그만으로도 감동적이다.  



또한 '인사볼'에서 또다른 미장센의 특징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반사광을 이용한 피사체의 제시이다. 이러한 장면은 자주 등장하며 이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인물을 편집을 통해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프레임 안의 같은 공간에다 제시함으로 압축적인 재미를 준다. 달동네 골목길에서 도망가는 성민은 그를 찾는 영구가 있는 여관 입구 유리창의 반사광에 의해 같은 공간에 포착된다. 그러나 영구는 그것을 보지 못하며 관객만이 영구의 맞은 편에 성민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만약 이 장면을 따로 따로 촬영하여 편집한다면 얼마나 그 맛이 떨어지겠는가? 소매치기를 잡는 동석 역시 그 소매치기의 손놀림이 반사되는 유리창에 중첩되어 등장한다. 곧 소매치기와 그것을 지켜보는 형사가 같은 공간에서 한 프레임으로 깔끔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반사광을 통한 피사체의 제시는 영화 내내 자동차 백밀러를 통해 혹은 선글라스의 반사광을 통해 지하철이나 건물 입구 유리 등을 통해 여러번 나타나 이명세 미장센의 또다른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인사볼'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미장센 뿐만이 아니다. 편집 역시 항상 새롭기 위한 정성을 쏟아 부었다. 도입부의 액션 장면에서 프리즈 프레임으로 순간 순간 멈추었다가 채색되어지는 장면의 신선함. 커트의 연결에 사용된 와이프-실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밑에서 위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갖가지 와이프가 다 동원된다-, 바람개비 모양의 아이리쉬, 혹은 스위쉬 팬 등의 다양함. 인상적인 고속촬영과 프리즈 프레임들. 중심 인물은 움직이지 않은 채 잔상을 남기며 디졸브되는 주변 인물들-이 역시 스텝프린팅이라고 불러야하나? 뭐라 불러야 할 지 모르겠다-의 효과는 편집이 '인사볼'에 기여한 큰 힘이다. 그 외 인사볼의 음악 역시 적재 적소 뛰어나다.  



이는 이명세라는 감독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 구사력이 다양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같은 이야기라도 맛깔 나고 감칠맛 나는 단어를 적절하게 끼어 넣어 말하는 이야기꾼의 입담이 더 구수하고 신명날 듯 하다. 그렇다면 이명세는 우리 영화판에 그 언어 구사력이 가장 훌륭한 혹은 어휘력이 가장 풍부한 감독일 것이다. 그런 타고난 재담꾼의 이야기가 무언들 재미가 없으랴!!



물론 박중훈의 연기가 '인사볼'을 압도하기도 했다. 한때 그가 잘나가던 시절, 너무나 다작을 한 나머지 스스로의 가치를 추락시킨 후 은인자중하며 내공을 닦으리라 수행하던 모습이 '인사볼'에는 투영되어 있다. 그런 그의 땀방울이 '인사볼'에는 묻어있었던 것이다. 박중훈이 아니었다면 '인사볼'의 영구는 살아나지 못했을 법도 하다...  



#  2009년, 이명세 53살 되는 해..



이명세 감독은 '개그맨'으로 1989년 입봉했다. 고로 올해는 그가 첫 작품을 내 놓은지 딱 11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 그의 나이는 43살. 23살에 충무로 연출부로 발을 들여 놓은 뒤 그에게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그간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감독들을 여럿 만나왔다. 대종상 신인 감독상에 빛나는 김홍준은 이제 영화 만드는 일은 포기한 듯 보이고, 80년대 아성을 쌓았던 배창호는 이미 자신의 시대를 다 흘려 보내 버렸다. 영화판 짬밥만으로 그리고 작품량만으로 최고를 달리는 임권택은 일진일퇴를 거듭할 뿐 변덕스럽기만 하다.



이명세는 그간 자신의 작품이 흥행하지 못할 때마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나보다' 하고 자신을 달랬다고 토로한다. 무뚝뚝하게 생긴 된장 뚝배기 같은 그의 얼굴은 그렇다고 영합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억척스러움에 익숙해 보인다. 20년 묵은 된장 뚝배기. 그렇다. 그의 고집과 열정은 20년 묵은 된장 뚝배기에 비길만 하다. 그 세월동안 담아낸 찌개 맛이 그 뚝배기 안에는 가득 가득 묻어있다. 그리고 그 뚝배기가 깨지지 않는 한 그 맛은 끓여낼수록 우러나게 마련이다.



2009년 이명세가 53살 되는 해는 그의 된장 뚝배기가 30년이 되는 해다. 나는 혀를 꼼지락거리며 그 30년 묵은 뚝배기 맛을 떠올리려 애쓴다. 지금의 작품수를 따진다면 2009년에는 아마 그의 열번째 정도 작품이 탄생하리라. 앞으로 그가 끓여낼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작품들을 건너뛰고 성급하게 열번째 먼저 상상하는 것은 물론 나의 욕심이다. 그가 끓여내는 찌개가 묵을수록 맛깔난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이의 행복찬 욕심... 욕심이 있는 자에게 세월은 오히려 감초처럼 달짝지근하고 약이 될 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세월의 저편에서는 항상 이명세가 우리를 달래며 위로할 것이다. 그의 뚝배기가 깨지는 그날까지...



철구 백
2003/01/12 06:27 2003/01/12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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