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풍보다 지독한 건 박사장의 어음결제였다. 식구들 일당 맞춰주려면 어음 깡을 피할 순 없었고 부족할 때는 카드 깡까지 기웃거렸다. 지긋지긋한 깡 인생이었다. 죽는 날, 식어버린 육신마저 일부를 깡으로 덜어줘야 흙에 묻히는 게 허락될 것만 같았다.
"아, 보자. 몸무게가 110근이니 4부 깡 해서 44근, 서비스로 40근만 뗍시다."
간과 콩팥이 들리고, 오른팔이 팔꿈치 아래부터 떼인다. 둘째 딸 미정이가 시집갈 때 해 준 반지가 오른 손엔 남아 있다. 그 손이 시릴 틈도 없어 떨어져 나간다.
"그 손엔 우리 딸래미가 해 준 반지도 껴 있다. 혼수 못 해주는 부모 원망 않고 도리어 나한테 맞춰 준 반지가 껴 있단 말이다. 그건 억만금 주고도 못 산다, 이 자식아."
"이 양반아. 깡 수수료는 없는 줄 알아? 그 반지가 깡 수수료야."
철근공 박씨는 자글거리는 눈 밑 주름들이 쓰렸다. 노조 만드는 일도 그처럼 쓰렸다. 하지만 노조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사용자들이 단체협상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화건설, 경기토건, 부유건설 등 다 다른 회사 사장들이 다 다른 현장에 있는 노가다들을 상대로 공통된 하나의 고용계약을 일괄로 체결할 리가 만무했다. 법적으로는 가능한 일이지만 현장마다 상황에 따라 고용방식은 달랐다. 우께도리를 주로 하는 목수 오야지 이씨는 어느새 깨어나 2.3인치 콩못 자국이 선명한 낡은 가방을 챙겨 자리를 뜨고 없었다.
오늘 술값을 내기로 한 이씨가 사라지자 철구는 불안했다. 철근공 박씨를 안 지 6년이지만 한 번도 그가 술값을 내는 걸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자신이 내야 될 판이다. 얼추 오만원 돈은 나올 성싶었다. 철구는 술값을 눈탱이 칠 요량으로 전화를 넣었다.
“에드윈. 여기 광어회 많이 남았는데 올래?”
철근공 박씨의 눈이 반짝였다. 에드윈.
에드윈은 종종 그들과 같이 노가다 일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였다. 이름은 에드윈이지만 그가 정확히 어느 나라 태생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비자가 있다지만 그의 비자를 구경한 사람도 없었다. 더구나 그의 외모는 어느 나라 사람이 봐도 이국적이었다. 각진 턱과 두툼한 코집은 태국이나 필리핀 계열 같았고 쌍꺼풀이 없는 눈과 하얀 피부는 중국 계열과도 비슷했으며 톡 튀어나온 광대뼈는 한국이나 일본 계열과도 흡사했다. 게다가 약간 갈색이 감도는 곱슬머리와 목 뒷덜미까지 올라온 성모 마리아 문신은 남미 사람처럼 보이게도 했다. 확실히 그의 외모는 이국적이라기보다 다국적이었다.
다국적 외모만큼 사용하는 말도 여러 가지였다. 영어도 곧잘 했고, 태국어와 라오스어, 중국어를 다 사용했다. 문제는 박씨도, 이씨도 태국어와 라오스어를 에드윈을 통해서 처음 들어봤다는 점이었다. 철구는 에드윈의 중국어가 확실하다고 거들었다. 자신이 중국 영화광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말과 에드윈의 말이 그럴싸하게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이들 모두가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에드윈의 한국어가 수준급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점에 미루어 이들은 에드윈의 다국어 능력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물론 그의 이력에 대한 이야기도 남달랐다. 말하는 사람마다 다르긴 했지만 중요한 몇 가지 유형을 뽑자면 이랬다.
베트남 출신이래. 18살 때 자기 여자 친구를 강간한 마을 지주 아들을 죽이고 라오스로 도망쳐서 마약 밀매를 했대.
어쩐지 얘가 좀 거칠더라니.
하지만 자기는 범죄를 통해 번 돈을 루앙프라방 인근 밀림에 사는 후앙족들에게 조건 없이 기부했다는 거야. 물론 익명으로 말이야.
그때가 에드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지, 아마.
사건은 다시 터지게 마련이지. 조직의 2인자인 람깜이 쿠데타를 일으킨 거지.
인생이 영화구나.
보스 캄츠랑을 보호하며 중국 국경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공안에게 잡혀 보스는 죽고 말았어.
그 자식 허리에 총알 자국 같은 게 두어 방 있더라고.
그때 국경 밀림에 마약 20킬로그램을 숨겨뒀대.
그것만 찾으면 다시 재기할 수 있다더군.
에드윈이 한국에 밀입국한 이유는 그 마약을 다시 회수할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지. 그 마약을 싸게만 팔아도 이백억이랜다, 이백억.
마닐라에서 알아주는 부자집 외아들이라던데? 그러나 하녀와 사랑에 빠진 게 화근이었지. 불행의 씨앗이랄까? 그 동네는 신분 구분이 엄격해서 하녀랑은 말도 섞으면 안 되잖아. 카스트라고.
그건 인도지.
마닐라가 인도 아냐?
마닐라는 인도네시아고.
그게 아냐. 하녀랑 사랑에 빠진 게 아니고 아버지 둘째 부인이랑 사랑에 빠진 거야. 집이 가난해서 돈에 팔려온 불쌍한 여자지. 그 여자도 에드윈을 만나서 진정한 사랑에 눈을 떴다고.
난 하녀로 들었는데...
아무튼 그래서 둘은 미국으로 도망쳤는데 여자가 그만 불치병에 걸렸다지.
맞아. 백혈병에 걸려서 미국에서 죽었대.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말이지.
어쩐지 애가 좀 쓸쓸하더라니.
집에서는 아버지 여자랑 바람난 호로자식이고, 사랑하는 여자는 객지에서 죽고. 그래서 그저 정처없이 떠돌고 있는데 얼마 전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왔대. 아버지가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나봐. 다 용서할 테니 집으로 돌아오래. 하지만 염치가 없어서 못 돌아가겠다고 고민하더라. 가기만 하면 엄청난 유산이 기다리는데.
태국 방콕대 교수였어. 역사 전공이었지. 굉장히 전도유망했대.
나이가 몇 살인데 교수야?
걔네는 군대 안 가잖아. 서른 살이면 교수할 수 있지.
이제 스물일곱이라는데?
서른일곱이 아니고?
난 마흔일곱으로 들었는데?
어쨌든 태국이 역사의 중심으로 부상할 수 있는 엄청나게 중요한 고대 유물을 연구 중이었대. 십자가에 못 박힌 석가모니 상이랬던가?
그런 게 정말 있냐?
동남아 역사학계 판도가 다 뒤집어질 만큼 민감한 주제였다지.
어쩐지 애가 똘똘해 보이더라니.
그런데 그걸 연구하지 말라는 정부의 압력이 들어왔다는 거야.
왜?
미국 CIA가 간섭한 거지.
아하.
하지만 에드윈은 연구를 계속했는데 뺑소니 교통사고로 가족이 전부 죽은 거야. 뻔하지 뭐, CIA. 결국 에드윈도 학교에서 쫓겨나고 알 수 없는 총격을 당했대.
그 자식 허리에 총알 자국 같은 게 두어 방 있더라구.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할 수 없이 태국에서 도망쳤고, 한국에 와서도 처음에는 계속 숨어다녔대.
요즘은 괜찮아?
탁신이 쫓겨났잖아. 그래서 정부 성격이 바뀌었다는군. 대학에서도 다시 와서 연구 계속하라며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책정해 놓았고. 그런데 완벽하게 신변 보호를 보장받지 못하는 이상 들어가지 않겠대.
에드윈의 이력은 모두 화려했다. 그리고 그 모든 버전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찬란한 미래에 대한 기약이 마련돼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에드윈은 화려하고 어두운 과거를 거쳐 행복으로 다가가고 있는 인생의 표본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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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는 인도네시아지... 저거 잔잔한 개그인가요?
2008/10/26 21:02ㅇㅇ
2008/10/29 16:311, 2 편 올려주세요 ^.^
2008/10/29 00:08이건 그냥 앞도 뒤도 생각않고 막 찌끄리는 거라
2008/10/31 16:36아직은 올리기 좀...
콘텍600 에다 쏘주 타먹구 쓴거야?
2008/11/11 20:40책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