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의 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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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철구가 이번에 맡은 바 임무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대한 채찍이다. 당근은 다른 구멍 식구들에게 맡기고 나 철구는 사기가루 갈아먹인 빠빳한 채찍을 하나 준비해야 하는 거다. 찰싹!  그러나 단언컨대 이 채찍은 애정이다.

정성일은 <월간 말>에서 이 영화를 '형편없는 완성도와 유치한 감상주의'라고 평했다. 물론, 이런 채찍을 글머리에 날려두고 그 아래로는 무대포라서 뛰어난 영화라고 칭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하면 이게 칭찬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나의 채찍도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영웅본색>에 대한 오마쥬가 매력인 이 영화한테 '유치한 감상주의'라는 문구는 너무 지나쳤다 싶지만 그 완성도가 떨어짐은 확연해 보인다. 붙지 않은 그림도 군데 군데 보이고 총 4부로 구성된 단편들을 하나로 모으다 보니까 연출에 일관성도 부족하다. (이 영화는 단편 4편을 하나로 종합한 영화다. 더구나 돈이 없다 보니 하나 찍고 돈 생기면 또 찍고... 이런 게릴라 정신으로 만들어졌다. 놀랍다) 인물의 성격이 발전한다는 것은 묘미가 있지만 그 동기가 또한 충분치 않다. 마지막 4부에서 보여준 성빈의 잔인한 면모는 1부와 2부에서 보여준 성빈의 인간적인 갈등과는 상충한다. 그리고 또 2부에서 보여준 미스테리함은 (특히 꿈에서 맞은 상처가 현실의 상처로 남아있다는) 전체 영화에서 드러나는 사실성을 해친다.

그러나 전언한대로 이 영화가 탄생하게된 배경을 알면 이정도 단점을 들추는 나 철구 자신이 초라해진다. 이는 정말로 티일 뿐이다. 티 하나 붙었다고 옥이 빛을 잃겠는가? 그 정도 티야 불면 날아가 버릴 거다.

문제는 이런 게 아니다. 내가 보기에 실상 문제는 바로 이 영화가 독립 영화, 대안 영화라는 명패를 달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는 감독이나 이 영화의 제작진들의 잘못이 아니라 말 갖다 붙이기에 신명난, 브랜드 만들어 팔아먹는 장사치 언론들의 잘못이다. 하긴 그럴만도 하지. 스포츠 기자와 문화부 기자의 경계는 꼴린대로, 책 한 권 읽으면 모든 영화를 씹어 제끼고 설탕칠해 놓을 수 있는 토익 점수 900의 엘리트들이니깐....

물론, 주류 영화판 자본에서는 독립한 영화다. 제작 방식도 대안적이다. 그럼 끝인가? 그럼 독립 영화이고 대안 영화인가? 나 철구가 보기엔 아니올시다, 백번 고쳐 생각해도 아니올시다 이다.

정성일은 앞서 말한 지면에서 '지난 시간의 무게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우리 영화들을 비웃으며 나타난 모든 망령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화' 라 이 영화를 평했다. 그렇다. 이 영화에는 망령이 없다. 지난 시간의 무게도 없다. 깊이도 없고 고민도 없다. 오로지 있는 것은 그의 말대로 '팝콘과 콜라', 6천원이란 지불에 대한 확실한 써비스 그 뿐이다. 이는 비난이 될 수도 있고 칭찬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 철구는 이에 대해서는 칭찬을 하는 쪽이다. 때로는 이 철저한 통속 속에서 한 가닥 담배를 태우고 깊게 연기를 뿜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현대인들은 아는 탓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긍정적인 통속의 즐거움에 독립과 대안이란 단어를 붙이기를 못마땅해 한다. 왜냐면 이 즐거움이야말로 비주류가 아닌 주류에서, 마이너가 아닌 메이져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이루려는 일 아닌가! 방식에서의 독립과 대안으로 정신에서의 독립과 대안마저 틀짓는 짓은 독립과 대안이란 이름을 박탈하려는 거다. 독립과 대안에 방식은 없다. 어떤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결국 그것을 규정하는 것은 오로지 정신의 독립과 대안일 뿐이니 말이다.

정성일이 앞서 말한 '지난 시간의 무게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 이란 표현은 마치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럴까? 그의 글이 실린 지면이 짧았던 탓에 과연 그가 말한 '지난 시간'이 내가 읽은 '지난 시간'과 같은 의미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나 철구는 바로 그 '지난 시간'에서 우리가 빠져나와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더 문제는 아무도 그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고 맞서려 하지 않는다는 거라 보인다. 우리를 부여잡는 더 커다란 망령은 '지난 시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자라난 블럭 버스터의 대박과 영화제 수상과 이식된 미학의 망령이다. '지난 시간'은 이미, 아니 애초부터 우리 영화의 관심이 아니었던 거다. 단 한번도 '지난 시간'에 묶여본 적 없이 산업과 자본의 법칙을 좇던 우리 영화를 보고 '지난 시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표현이 가능한가?

독립과 대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지난 시간'에 방점을 찍어줄 영화에 있다. 그 '지난 시간'에 대한 성찰과 대결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용기에 있다. 지난 시간이란 우리에게 얼마나 가슴 아픈 말인가! 그 '지난 시간'은 틀어지고 왜곡되고 지배받고 착취당한 굴욕과 고통의 역사... 그것은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고 뚫고 맞서야 하는 것이다. 자본의 흡혈에 맛들인 주류와 메이져가 결코 할 수 없고 하지도 못할 일이기에 그 '지난 시간'의 몫은 바로 독립과 대안에 있다. 이 예술보다 숭고한 예술의 소명. 그 책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독립과 대안의 정신이 아니면 이 체제 내에서는 쉽게 이루지 못할 일인 거다.

물론, 이 몫을 제대로 하려는 독립과 대안은 많지 않다. 하지만 어설프게 흉내내기만 하면서 그 몫을 하고 있다고 '척'하는 영화들이 독립과 대안의 명패를 갖고 있다. 나는 그렇게 구멍많은 독립과 대안의 명패를 또 다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의식없이 전이시키는 짓이 못마땅할 뿐이다. 앞서 말한대로 이 영화의 미덕은 메이져의 즐거운 긍정의 통속을 마이너의 자유로움으로 이루었다는 것인데, 그게 독립과 대안이라 한다면 우리의 '지난 시간'은 과연 누가 돌봐줄 수 있나 말이다. 자본에서 자유로운 영화들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할 수 없을 거다. 슬픈 일이다.

나 철구는 우리 사회가 해피한 사회가 아니라고 본다. 어느 사회가 모든 사회원을 해피하게 만들 수 있을까마는 우리는 더욱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문제가 있으면 치유해야 한다. 그 치유의 처방전은? '지난 시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그 첫걸음 아니겠는가? 틀어지고 왜곡된 역사를 먼저 바로세운 후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를 직시하게 하는 그것일 거다. 증상이 나타나면 병의 원인을 찾는 것. 그게 바로 '지난 시간'에 대한 직시와 성찰의 되새김일 거다. 본격적인 수술은 그 후에 가능하겠지.

그럼 영화는 뭘 해야하나? 뒷짐지고 재롱피고 나 몰라라하면 되는 것인가! 자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매체이다 보니 자본의 병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매체 영화. 뒷짐지고 재롱피고 서커스하고 총질하고 카체이스하고 연애하고 빠구리하고 하고 하고 하고 하고 하는 것도 좋다. 인정한다. 하지만 나 철구는 영화도 이제 용기있게 같이 행동했으면 하는 거다. 지난 <설사> 기사에서 김선화씨가 말한 '용기있는 감독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이 새롭게 와서 박힌다.

제작사들은 왜 신인감독을 선호하는가? 당연하지. 말 잘 들으니까. 그건 곧 자본의 법칙에 철저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거고, 언론과 영화잡지들은 얼씨구나 그 자본의 휘호에 들어가길 마다하지 않고..... 개봉관 싸그리 잡아 일단 흥행하게 만들고, 그렇게끔 마케팅하고, 각종 언론 지면은 말도 잘 듣지, 열씨미 홍보해 주고....

이런 체제 안에서 행동하는 영화는 나오기 힘들다. 지금 유일한 길은 독립과 대안. 바로 그 곳에 기대하는 것이다.

다행히 류승완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우리 땅에서 독립영화라 함은 단어가 가지는 의미 이상의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 영화가 대안영화가 되기엔 너무 통속적이다' 라고 말한다. 난 이 인터뷰 내용을 보면서 참 영특하고 무서운 감독이란 생각을 했다(이 역시 물론 칭찬이다) 그보다 더 놀란 것은 3부 <현대인>을 찍어낸 그 정성의 연출이었다.

그렇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칭찬받기에 충분한 영화다. 그러나 그 칭찬이 또 제 몫의 칭찬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독립과 대안이란 이름 역시 브랜드 상표로 만들려 하고 있다. 나는 그게 못마땅할 뿐이다.

철구 백
2003/01/12 06:47 2003/01/12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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